기자협회 4·3 참배 행사…7개 지역 기자협회 임원·회원 참석
기자협회 4·3 참배 행사…7개 지역 기자협회 임원·회원 참석
  • 대구경북기자협회
  • 승인 2023.04.2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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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협회와 지역기자협회장 등이 제주4·3의 숭고한 정신을 청취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와 지역기자협회장 등이 제주4·3의 숭고한 정신을 청취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회장 김동훈)와 제주도기자협회(회장 좌동철)는 제75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을 앞두고 3월 24~25일 제주에서 희생자들의 영령을 기리는 참배 행사를 진행했다.

대구경북기자협회(회장 진식), 경남울산기자협회(회장 조윤제), 광주전남기자협회(회장 맹대환), 인천경기기자협회(회장 이호준), 대전세종충남기자협회(회장 황윤성), 충북기자협회(회장 하성진), 전북기자협회(회장 이종완) 등 7개 지역 회장단 20여 명은 지난 25일 제주4·3평화공원 위령성지에서 참배 및 분향을 했다.

한국기협과 지역기협 회장단이 제주를 방문한 계기는 세계 냉전과 한반도 분단 속에 발생한 제주4·3사건이 70년이 넘도록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마을에 살면서도 보복과 원망이 아닌 화해와 상생으로 국가폭력을 극복, 전 세계 과거사 사건 중 모범적인 해결 사례를 배우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제주 도민사회와 정부의 노력으로 제주4·3의 정의로운 해결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진상 규명에 이어 국가 보상금 지급, 재심 재판을 통해 현재까지 도민 1191명이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제75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을 맞아 이뤄진 이번 방문은 현대사에서 굵직한 민주화운동사를 지닌 4개 지역의 ‘민주화 벨트’를 잇고, 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가치관 확립을 위해 협력하고, 공정하고 올바른 취재·보도를 위해서다.

앞서 대구경북기자협회(2·28민주운동)와 경남울산기자협회(3·15의거), 광주전남기자협회(5·18민주화운동), 제주도기자협회(제주4·3사건)는 지난 2021년 3월 한국 현대사 왜곡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 민주화 운동 벨트를 결성하고 상호 교류 및 행사를 이어가기로 협약을 맺은 바 있다.

좌동철 제주도기자협회장은 “제주4·3은 한 마을이나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이념과 냉전의 대결이었고, 화해와 상생의 극복 과정은 과거사 사건 해결의 세계적인 모범 사례인 만큼, 4·3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기록 등재를 위해 언론인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동훈 한국기자협회장은 “최근 일부 극우단체에 의해 제주4·3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며 “정의로운 제주4·3을 만들어가기 위해 기자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과거사 사건에 대해 올바른 역사관을 세워 나가야 4·3의 정신인 화해와 상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키워드) 제주4·3사건이란

1945년 광복을 맞아 일본에서 귀환한 제주도민은 6만명에 이르면서 실직난과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콜레라 창궐, 대흉년, 양곡정책 실패 등 어려 악재가 겹쳤다.

미군정이 통치하면서 일제 경찰은 군정 경찰로 변신했고, 군정 관리의 부정·부패는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1947년 3·1절 기념식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가두행진이 이어졌다.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유혈 진압에 반발해 그해 3월 10일 공무원과 교사, 학생, 회사원 등 민·관 사업장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총파업을 벌인 2500여 명을 구금했고, 이 중 3명이 고문으로 사망, 도민들은 더욱 반발하게 됐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인 무장대 350명이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유혈 사태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7년 7개월 동안 이어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여 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공격했다.

섬 곳곳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 전체 인구의 30만 명 중 10%인 3만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됐다. 중산간마을 95%는 불에 타면서 폐허로 변했다.

유혈 사태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돼 많은 양민이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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