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신문,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대구 출신 임정요원 소개
대구신문,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대구 출신 임정요원 소개
  • 대구경북기자협회
  • 승인 2019.04.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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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 애국지사, 대구 독립운동 유적지의 체계적 관리 지적
임시정부 소속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현수 3부자 생가 터(대구 달성군 화원읍). 출처=대구신문 홈페이지

대구신문이 11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대구 출신 임정요원 3명을 소개했다. 

대구신문은 4월 11일 자 1면에 <이현수·문영박·최종응…대구 출신 임정요원 아시나요>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임시정부에 힘을 보탠 대구지역 독립운동가 중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인물 중 이현수 3부자와 문영박·최종응 지사를 소개하며 조명받지 못한 대구 출신 애국지사들과 유적지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전했다.

대구신문은 기사에서 광복 후 이산가족이 된 3부자 독립운동가 이현수 스토리는 질곡의 현대사 속에서 한 가정이 겪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소개했다. 

3부자 독립운동가의 가장이었던 이현수는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에서 나고 자랐다. 이현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시절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발을 들였다.

그는 1920년 임시정부 재무부 서기를 역임하며 본격적인 임시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이현수는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며 영문 잡지 ‘자유’, 기관지 ‘한성’등을 발행해 주로 국내·외에 임시정부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는 대구·경북 각지의 친일파 부호들에게 경고문을 보내고 이를 대구 길거리에 배포했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던 이 지사는 감시를 따돌리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해 자수 후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현수는 백범이 만든 한국독립당, 조선의용대 등 여러 단체에 참가해 다방면으로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가 역임한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 △임시정부 법무부 차장 △내무부 차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장의 지위를 통해 그의 임시정부 내에서의 족적을 가늠할 수 있다.

장남 이정호도 아버지의 등을 좇아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정호는 1935년 중국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후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 광복군 등에 소속돼 일선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다.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 △외무부 총무과장 △외무부 정보과장을 맡았다. 차남 이동호의 기록은 화북의 조선의용대 소속으로 활동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으며 3부자는 갈라지게 됐다.

장남 이정호는 1948년 총무처 정훈국장을 역임했다. 3부자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이름을 올린 이 지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차남 이동호는 해방 후 월북했다. 아버지 이현수는 해방 후 조선대중당을 조직해 단독정부 수립 반대·통일 운동을 펼쳤다.

이 후 행적이 묘연하다. 이정호 지사의 유족들은 이현수가 차남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화원 명곡리에 위치한 3부자의 생가 터에는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아 일반 시민들이 관심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구신문은 이씨 부자 외에도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에 힘을 보탠 문영박, 최종응도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문영박은 달성군 화원읍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나고 자란 터는 대구시민들에게 ‘문씨 세거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대해 아는 사람은 적다.

문영박은 당시 영남의 부호로 임시정부 수립 후 타계 전 1930년까지 11년에 걸쳐 정부에 자금을 보냈다.

그의 재산이 임정으로 흘러간 것을 파악한 일경은 문 지사를 체포해 한 달간 대구경찰서에 구금했다.

1930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시정부는 “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은 동양 평화와 유신을 크게 내세워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서이다.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가 독립을 하지 못한 것은 일제의 탄압 때문이다. 고인이 이러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의연금을 보내주어 무궁한 국가 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을 감사한다.”는 내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보냈다.

하지만 이는 일제의 감시 탓에 전해지지 않다 광복을 맞고 나서야 후손들에게 전달됐다. 후손들은 문 지사를 기리기 위해 수봉정사를 건립했고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최종응은 1871년 대구 동구 둔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임시정부 경북 선정사로 임명돼 동료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하는데 힘썼다.

조달 과정에서 공갈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대구신문은 이현수 3부자, 문영박, 최종응 외에도 대구시민들에 잘 알려지지 않은 대구 출신 애국지사들과 그 흔적들이 대구 도처에 있다고 소개했다. 

일각에서는 대구 출신 애국지사, 대구 내 독립운동 유적지의 체계적 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김명환 광복회 대구지부장은 “애국지사들의 집 터, 생가 터를 모두 보훈 시설로 지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독립운동에 힘쓴 분들을 파악·정리해 ‘독립운동 기념관’처럼 한 자리에 모두 모시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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